매운 것을 잘먹지 못하지만 가끔은 강렬하고 견디기 힘든 매운맛 속으로 들어 가고 싶을 때가 있다. 목덜미에서 땀이 비오듯 흐르고 이마에 열기가 차올라 연신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야 하지만 내 몸과 마음을 강타하는 매운 맛의 세계에 마치 뒷골목 패거리들의 멤버가 되듯 빠져 들고 싶을 때가 있다. 요즘 며칠 그랬다. 자꾸 눈 앞에 낙지나 쭈꾸미가 아른 거리고 평소 매운 음식이라면 손사래를 치며 뒷걸음 쳤지만 일부러 선봉장 이라도 된 듯 그렇게 앞장서고 싶은 날들이었다. 이날 너무나 춥지만 평온한 일요일 아침 평소대로 우린 단골 바지락 칼국수 집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러다 마치 자석에 끌린 쇠붙이 처럼 이집이 눈에 들어 왔다. 포천 부인터 사거리에서 어하터널을 빠져 나오자 마자 보이는 강렬한 붉은 간판의 이집으로 가게 된 것이다.
이름하여 힘 낙지 쭈꾸미 집이었다. 지친 황소도 일으켜 세운다는 그 강장음식의 대명사인 낙지와 쭈꾸미를 파는 곳이다. 낙지와 쭈꾸미는 크기만 다를 뿐 생긴 것이 사촌 지간 맞는 것 같다. 다만 쭈꾸미는 주로 볶아서만 먹지만 낙지는 연포탕이라는 국물 요리도 있다. 매운 것을 훨씬 잘 먹는 그녀는 평소에도 이 음식들을 즐기고 먹으면서도 별로 고통스러워하지 않는다. 밖에서 보이는 것처럼 이집은 엄청 큰 규모의 식당이다. 연중 내내 쉬지 않고 영업한다는 말이 참 무섭고도 고맙게 다가왔다. 언제나 이 맛이 그리우면 무슨 날인지 따지지 않고 오면 되는 것이다. 넓은 실내에는 다소 이른 시간이었지만 손님들이 삼삼오오 자리를 잡고 낙지와 쭈꾸미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간간히 술 잔을 기울이는 아재들이 보였다. 슬쩍 먹고 싶냐고 묻긴 했지만 먹고 싶어도 속내를 보이게 되면 하루 종일 힘들 수 있기 때문에 아니라고 했다.
처음 계획은 낙지볶음에 밥을 비벼 먹는 것이었지만 워낙 낙지를 좋아하는 우리는 산낙지에 미련이 남아 한 접시 주문했다. 낙지볶음이 1인분에 12,000원이면 다른 집에 비해 다소 비싼 가격인 것은 맞다. 물론 맛과 양이라는 변수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래서인지 여긴 다른 집들에 비해 반찬이 좀 많이 나오는 편이었다. 물론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두부김치와 작은 전을 하나 주는 것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다른 테이블을 움쳐 보니 대부분의 손님들이 낙지볶음에 밥을 비벼 먹고 있었다. 우리와 같은 생각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처럼 산낙지를 먹는 손님은 없었다. 산낙지 한 접시에 20,000원이라는 가격이 비싼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산낙지라는 음식이 주는 안주 이미지가 강해서인지 다른 사람들은 간간히 연포탕을 먹긴 해도 산낙지를 먹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려면 어쩌랴? 우리만 좋은면 그만인 것을... 산낙지 한 접시의 양이 얼마나 많던지 밥을 먹는 내내 집어 먹었는데도 결국 몇 점은 남고 말았다. 물론 무척 싱싱했고 말이다. 산낙지를 술 없이 먹으려니 이것도 고통스러운 일이라 아무래도 나는 평소보다 젖가락이 덜 간 것은 사실이다. 그것을 눈치 챘는지 마눌이 다음엔 저녁에 와서 연포탕과 산낙지로 한 잔 하란다. 음 ... 아무래도 여긴 다시 와야 할 듯이다. 그렇게 산낙지를 먹고 있노라니 드디어 메인 디쉬인 낙지볶음이 나왔다. 우리는 주문할 때 보통 매운 맛을 선택했다. 물론 그래도 맵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 매운 맛에 한껏 빠지기 위해 왔으니 상관없다. 밥이 그냥 쌀밥이라고 하긴엔 너무 노란색이었는데 강황을 넣어서 그렇단다. 몸에 좋은 강황이 들어간 밥이라... 이것도 다른 곳에서 구경 못한 밥이다.
낙지볶음의 양이 어마 어마 하게 많다고 하긴 그렇지만 적당하게 나왔다. 낙지살이 튼실한 것이 내가 기대하던 그 모양이었다. 집 근처에도낙지볶음 집이 있지만 평소 그렇게 만족스럽다고 하긴 좀 부족한 감이 있었지만 여긴 좀 더 내실이 있어 보였다. 장사가 잘 되는 집은 재료의 순환이 잘되어 아무래도 싱싱하고 질좋은 재료가 사용된다. 그런 것이 더 많은 손님을 불러 모아 상승 효과를 일으키는 것 같다. 여기가 그랬다. 낙지의 상태가 참 좋았고 그래서 식감이 무척이나 부드럽고 야들거리며 고소했다. 거기에 알싸한 매운 양념과 불맛이 더해지니 내가 기대하던 바로 그 낙지볶음의 맛이 났다. 색이 강렬한 낙지 볶음은 밥에 데친 콩나물과 야채를 넣어 먹어야 제맛이다. 그릇에 담긴 콩나물을 다 때려 넣고 낙지볶음과 함께 밥을 비볐다. 이렇게 밥을 비비는 시간이 마치 대단한 도자기라도 만드는 도공처럼 진지하기 그지 없다.
이 밥 한 그릇이면 잃었던 입맛도 돌아오고 잠시 헤이해졌던 마음도 다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뒷덜미를 때리는 강렬한 매운 맛이 나의 마음을 확실히 다부지게 만들어 주고 잠시 떨어졌던 전의도 불타오르게 만들 수 있다. 어느 정도 밥을 비빈 다음에 드디어 입안으로 이 녀석들을 집어 넣었다. 아 이 맛이다. 강하고 맵고 시원하고 고소하고 쫀득거린다. 생각 같아서는 이것보다 더 매운 맛이라도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내 나는 그런 마음을 접고 만다. 반쯤 밥을 먹었을까 이내 흘러 내리는 땀들을 주체할 수 없어 연신 손수건을 이리 저리 흔들어야 했다. 아 나는 정말 매운 것을 잘 못먹는 사람이구나 하는 자조 섞인 탄식이 저절로 흘러 나왔다. 하지만 그래도 손에서 숟가락을 놓지 않았다. 오늘만은 끝까지 이 강렬한 상대를 그대로 보낼 수 없었다. 나 역시 만만치 않다는 것을 제대로 보여주리라...
결론적으로 보면 나는 결국 이 싸움에서 패하고 숟가락을 내려 놓고 마눌이 열심히 잘 먹는 모습을 박수치면서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참 맛있었다. 내가 바라던 그 뒷목을 때리는 매운 자극이었다. 점심 시간이 지나면서 손님이 점점 더 늘고 그 넓은 홀이 거의 사람들로 채워질 무렵 우리는 일어났다. 왜 그리 매운 것을 못먹냐는 마눌의 타박도 오늘은 나쁘지 않았다. 이 정도면 나는 중과부적의 적을 상대로 장렬하게 끝까지 싸운 패전의 장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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